[제주 체험기] DAY 2 : 제주는 저녁 8시만 되어도 깜깜하다

못하는 게 많아졌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다
기사입력 : 2021-07-26 16:28:53 최종수정 : 2021-07-26 17: 26 차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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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앉아 일을 했다. 일하다 잠깐 고개를 돌리면 펼쳐지는 파란 제주 바다. 바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 사진=차민경 기자 / 숙소 창문으로 보이는 제주 풍경!(2021년 4월)

#2.
 


‘옷을 더 많이 가져온 줄 알았는데, 이상하다 너무 없네.’ 알고 보니 스타일러에 두고 깜빡했다. 남편에게 택배로 부쳐달라고 하려고 알아보니 제주도는 섬이라 택배비가 비싸단다. 오죽하면 전남에 제주도민 전용 배송대행지까지 있다.

그냥 단출하게 살기로 했다. 매일 아침 뭘 입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다.

#3.

음식도 마찬가지다. 여기 온 지 하루 만에 난 무엇을 먹을지 서울에서처럼 고민하지 않게 됐다. 옷과 똑같은 이유로 말이다.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것!

#4.

내가 꾸준하고 소소하게 사치를 부리는 분야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음식이다. 맛집을 애써 부지런히 찾아다니지는 않지만 내 취향에 맞는 음식을 매일 한 끼는 먹어야 한다. 문제는 내 음식 취향이 독특하고 까다롭다는 거다.

남편이 명명하길 ‘외국인 입맛’인 나는, 혼자 식사할 때 한식을 먹는 경우는 1년에 10번이 채 안 된다. 한국사람 입맛에 맞춰 현지화되지 않은 백프로 이국적인 해외 음식을 좋아한다. ‘까르보나라’에는 우유나 크림 대신 계란만 들어가야 하고, 멕시코 타코의 ‘또띠야’는 밀보다는 옥수수로 만든 게 낫다는 식이다.

또 나는 섬세하고 풍성한 맛을 가진 음식을 사랑하는데, 내 인생 최고의 요리로 바르셀로나에서 먹었던 ‘분자요리’를 꼽을 정도다. 난 식재료를 분자 단위까지 자르고 변형시켜 재창조해낸 분자요리가 평생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인 거다.

이런 내 음식 취향과 남편의 잦은 야근이 겹치면서 난 서울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배달을 시켰다. 쿠팡이츠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음식점들이 등록되어 있었고 매일 몇십개씩 신규 맛집이 새로 생겨나기까지 했으니 하루에 1시간씩은 음식점을 고르는 데 시간을 쓰곤 했다.

 

#5.

이곳 제주도 조천읍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일단 쿠팡이츠는 없다. 그나마 배달의 민족은 서비스를 하는데, 대부분이 포장만 가능하고 배달되는 곳은 10개도 안 되는 듯하다. 내가 좋아할 만한 음식점은 저 먼 함덕의 햄버거집 하나. 배달비가 2천원이랬는데 실제로 시켜보니 추가 배달비를 더 입금해야 한단다.

결국 식당에 직접 가서 먹기로 마음먹었다. 업무가 많은 날이었기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여야 했다. 숙소에서 추천해준 맛집 리스트를 보니 숙소 서쪽보다는 동쪽에 음식점이 더 많아 보였다. 동쪽을 택하니 선택지가 열 몇개로 줄었다. 거기서 카페를 빼고, 어제 저녁에 먹은 식당을 제외하고, 걸어서 20분 넘게 걸리는 곳을 걸렀다. 그리고 나니 3군데가 남았는데 이 중 2군데가 영업을 쉰다.

그렇게 한 군데만 남았다. 백반집이었다. 맨 위에 있는 제육볶음 고등어구이 정식을 시켰다. 딱 기대했던 것만큼 괜찮았다. 기교 없이 단순하고 소박한 차림. 정직하고 투박한 한 상이 실망스럽기보다는 묘하게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며 음식점 리스트를 스크롤하던 서울에서의 시간이, 이국적이고 풍성하고 섬세한 요리가, 문득 군더더기처럼 과하게 느껴졌다. 제주에서 만큼은 맛있게 보다 심플하고 건강하게 먹어보고 싶어졌다.
 

▲ 사진=차민경 기자 / 제육볶음과 고등어구이 (2021년 04월)


#6.

노을 지는 하늘이 예뻐 감탄하며 바라보다 산책을 하러 나가기로 했다. 8시쯤 되었는데 이 정도면 서울에선 한낮이라 별생각 없이 밖으로 나갔는데,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금방 깜깜해졌다.

가로등도 거의 없고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어서 내가 여기서 갑자기 어떤 자객한테 살해당해도 다음날 아침이 되어야 발견될 것 같았다. 무서워서 산책하다 말고 전속력으로 뛰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이어달리기할 때 이후로 이렇게 빨리 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헥헥대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여기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야 하는구나.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데, 나는 그동안 낮에도 밤에도 일어나 있길 바랐던 것 같다.

 

▲ 사진=차민경 기자 / 같은 풍경, 낮의 모습, 낮엔 예쁜데 밤엔 무섭다... (2021년 04월)

 

▲ 사진=차민경 기자 / 같은 풍경, 밤의 모습. 낮엔 예쁜데 밤엔 무섭다... (2021년 04월)


#7.

제주에 온 지 둘째 날. 한계라고 말하기도 우스운 소소한 한계들과 맞닥뜨렸다. 당연히 선택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들을 더 이상 선택하지 못하게 됐다.

무엇을 입을까 고민할 만큼 옷도 없고 뭘 먹을까 고민할 만큼 내 취향에 맞는 음식점도 없다. 저녁에 산책하러 나갈까 말까 선택할 필요도 없다. 못 나간다.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진 게 이상하게 해방감을 준다. 서울에 있을 때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내 선택의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내 선택이 최선인지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의심했다.

그런데 제주에 오니 그럴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내 선택 밖이다. 못 하는 게 늘어났다는 사실이 개운하다.

 

- 2021년 4월 27일, 제주살이 2일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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