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의 역사는 명품 대중화와 맞물려 있다. 귀부인들만의 ‘가방’에서 이제는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브랜드, 루이비통. 그러나 여전히 루이비통은 명품이다. 높은 가격대로 인한 소비자의 접근에서의 희소성이 명품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국내 플래그십 스토어를 비롯해 유명 백화점·면세점에 입점해 방문객에게 루이비통만의 트렌드를 반영하는 한편 여전히 루이비통은 ‘스페셜 오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1869년 콩고를 거쳐 아프리카로 가는 프랑스의 탐험가 피에르 사보르낭 드 브라자를 위해 침대로 변형이 가능한 트렁크를 제작했다. 해당 주문 제작시스템은 1954년 정식으로 출시된 이후 ‘하나뿐인 루이비통’을 만들고 있다.
루이비통이 어떻게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혹은 이와 같은 명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국내에서 3대 명품으로 일컬어지는 루이비통, 샤넬, 에르메스. 그 중에서도 루이비통은 패션이 아닌 가방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된 이례적인 패션 브랜드다. ‘LV’만 봐도 ‘루이비통’이 절로 생각나는 것도 명성을 방증하는 예다. 루이비통은 여전히 ‘가방’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우리가 가방을 찾게 되는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자. 그 곳에 루이비통의 시초가 있다.
【여행과 루이비통, ‘떠나다’】
창립자 루이비통(1821년생)은 14세에 고향 프랑스 콤테를 떠나 걸어서 파리에 도착했다. 400㎞를 걸었기 때문에 2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파리에서 루이비통은 포장용 상자 제조 견습생으로 일을 하며 귀족들의 여행 짐을 꾸렸다. 당시 시대는 철도선이 개통하며 먼 곳으로 떠나는 일이 잦아지던 때였다. 고속철도에 이어 자동차의 시대도 막을 올릴 때다. 이때에 옷을 짐 가방에 넣는 일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유행했던 패션은 파리 오트쿠튀르 컬렉션의 시조로 알려진 찰스 프레데릭 워스의 옷이었다고 한다. 일례로, 찰스 프레데릭 워스의 옷은 엄청난 양의 옷감이 들어가며 그 부피 또한 상당했다고 한다. ‘패티코트’라는 패션이 유행했던 때이기도 하다. 여러 겹으로 된 속치마가 치마를 크게 부풀리게 해 입는 형태다. 이런 옷을 짐 가방 속에 넣는다고 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 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루이비통은 이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이 짐을 꾸릴 때면 루이비통을 꼭 찾았다고 한다.
1854년 루이비통이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자신의 매장을 열었다. 이곳에서 그는 당시 일반적으로 뚜껑이 반원형인 트렁크를 버리고 짐 가방을 쌓기 편하게 뚜껑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소재 또한 무거운 가죽 대신 방수면 캔버스를 씌운 포플러 목재를 사용, 바다에 빠져도 물 위에 뜰 수 있게 했다. 1914년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루이비통 부티크를 오픈했다. 여행과 관련된 제품을 판매하는 세계적으로 가장 큰 매장이었다.
‘LV’가 새겨진 루이비통 마크는 루이비통의 아들 조르주 비통이 개발했다. 본래 개발 목적은 모조품 방지였으나 이제는 루이비통을 상징하는 로고로 자리잡았다. 조르주 비통은 처음에 그레이 트리아농, 빨간 스트라이프 무늬, 격자무늬 등을 가방에 넣었으나 1896년엔 모노그램 캔버스를 만들었으며, 이후 현재의 형태가 됐다. 조르주 비통은 아버지 이름을 따서 L과 V를 결합했으며, 당시 아르누보 양식에 따라 꽃과 별 무늬를 반복해 넣었다. 이외에도 5개 날름쇠로 된 자물쇠 또한 아들 조르주 비통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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